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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

[영원] 스물아홉

홋공전력 50- 우리는 사랑할 때를 지나쳤는가

 

 

 

목도리를 고쳐 매며 대리를 기다렸다. , 하고 불자 입김이 훅하고 끼쳤다. 손이 조금 시려서 코트 주머니에 넣었다. 신발 안에 든 발가락이 언 느낌에 꼼지락 움직였다. 대리는 왜 이렇게 안 와. 부른 지 얼마 되진 않았지만 괜히 급한 척 손목시계를 계속해 쳐다봤다. 얼마 안 지나 대리 차량이 급하게 멈춰서고 한 남자가 내렸다. 늦어서 죄송해요, 늦지도 않았지만 인사처럼 하는 말에 같이 고개 숙여 인사하고 고개를 들었다. 차키를 내밀고 대리 얼굴을 봤다. 대리가 내뱉는 하얀 입김 연기가 주위로 흩어지고 순간 시간이 멈췄다.

 

차분히 갈색 머리가 내려져있고 추운 듯 볼이 빨간, 눈매가 여전히 사나운 듯 귀엽게 올라간, 권순영이었다.

 

 

과장님의 차키를 넘기며 명함을 하나 건네받았다.

 

천사대리 010-xxxx-0717 권순영.

 

서둘러 과장님의 차에 올라타려는 권순영의 어깨를 붙잡았다. 붙잡힌 권순영이 뒤돌며 내 눈을 마주한다. 동시에 고등학생 때로 돌아간듯한 느낌이 들었다. 한참 멍하게 바라보는데 권순영이 말을 걸었다. 보자마자 했던 그 죄송하다는 말 빼고는 첫 마디라 귀 기울여 집중했다. 여전히 다정한 약간은 끝이 귀엽게 모여지는 그 음성일지.

 

 

 

할 말있으세요?”

 

 

 

멍청한 소리를 내며 어깨를 잡은 손을 놓았다. 할 말이 있어야 잡을 수 있는 사이인 줄 미처 몰랐다. 나는 아직도 고등학생 때의 너와 나를 생각하고 있었다. 너를 상상하며 지나온 모든 시간동안 나에게 너는 그저 내 옆이 당연했던 그 권순영이었기 때문에. 20살 고등학생이라는 신분을 벗어나던 졸업식, 그 겨울 이후 벌써 9년이 지났다. 내가 그 때의 내가 아니듯 네가 그때의 네가 아닌 게 당연하다는 걸, 미처 생각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도. 그래도 나는 여전히 네가 그립고 보고 싶은 전원우인데. 너는 아니라는 건 좀, 너무하다. 우연한 만남에 아는 척도 안 하고 지나가는 그런 사이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손에 든 명함을 힘주어 쥐었다. 빳빳한 명함이 손 안에서 약간 구겨지는 게 느껴졌다. 네 번호와 이름이 적힌 명함이라 이내 손에서 힘을 빼는 내가 약간은 한심하게 느껴졌다.

 

 

목도리에 얼굴을 묻으며 뒤로 물러섰다. 권순영은 어정쩡한 자세로 서서 나를 바라보다 곧 차에 올라타 시동을 걸었다. 과장님은 술에 취해 조수석에 뻗은 채였다. 조수석으로 돌아가 과장님을 약간 흔들어 깨웠다. 전대리, 해가며 헛소리를 하는 과장의 입을 막고 싶었다. 권순영과의 만남에 술에 찌든 과장의 술주정까지 더하고 싶지 않아서.

 

 

차량 문을 온 힘을 다해 쾅 닫으며 뒤돌아 버스정류장으로 걸어갔다. 졸업식 이후 연락 끊긴 권순영 뭐가 이쁘다고 걱정하고 지냈는지. 지난 9년의 세월이 속상했다. 지금의 권순영에게서 한 걸음씩 멀어질 때마다 고등학생 때의 권순영이 뿅뿅 떠올랐다.

 

 

고등학교 입학식 때 낯가림 심한 내가 혼자 동떨어져 서있을 때 먼저 다가와 손 내밀며 밝게 웃던 권순영. 이내 제일 친한 사이가 되어 아침부터 야자 끝날 때까지 하루 종일 붙어 다녔던 권순영과 전원우. 의미심장한 말과 행동들로 밤새 잠 못 들고 고민했던 열여덟, 열아홉의 전원우.

 

 

어른되면, 원우야.”

 

.”

 

좀 더 용기가 생길까?”

 

무슨 용기?”

 

그냥 뭐든. 좋아하는 것도 다 말 할 수 있는 그런 용기.”

 

 

 

그 말을 하던 권순영이 눈을 빛내며 나를 쳐다보는 것에 나는 많이 설렜다. 그 말이 꼭 나를 좋아한다는 말인 것 같아서 운동장 스탠딩 계단에 앉아 축구하는 애들을 멀가니 쳐다보며 고개만 끄덕였다. 어른 되면 다 생길거야. 고백할 용기. 내가 너를 좋아한다는.

 

 

스무살, 어른을 기다리던 나는 졸업식과 동시에 감쪽같이 사라진 너를 얼마나 찾아다녔는지. 순영아 그거 알아. 스물은 나에게 악몽과도 같은 나이였어. 네가 내 옆에 없다는 것만으로도. 네가 없다는 걸 네가 떠났다는 걸 받아들이고 인정하기까지 1년이 넘게 걸렸다. 1년 동안, 그 스무살동안 내가 얼마나 너를 많이 생각하고, 원망하다가도 네가 보고싶어 울었는지.

 

 

열일곱, 열여덟, 열아홉의 권순영이 예의 그 다정한 시선으로 그 다정한 목소리로 내게 말을 걸어왔다. 스물아홉의 권순영은 할 말 있냐는 그 차가운 말로 우리 사이에 선을 그었는데. 내게 더 익숙한 건 다정한 권순영. 무슨 일 있냐며 묻는 열일곱의 권순영과 어깨를 토닥이는 열여덟의 권순영, 내 눈가를 쓸어주며 씩 웃는 열아홉의 권순영.

 

 

네가 줄곧 하고 다녔던 하얀 목도리를 풀어내는데 뒤에서 탁 탁 뛰어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린다. 너일 리가 없지만 너이기를 바라며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가까운 뒤편에서 소리가 줄어들더니 뚝 끊겼다. 그치. 너일 리가 없지.

 

목도리를 다 풀어 한 손에 쥐었다. 목이 답답해 목도리를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다. 겨울마다 네가 매주던 목도리가 습관이 되어 나올 때마다 꼭 들고 나왔을 뿐. 목도리를 풀어내니 목이 확 시리다. 추위가 코트사이를 헤집고 들어온다. 겨울은 언제나 춥다. 네가 있었을 때도 추웠을까. 추억의 미화 탓인지 네가 있었던 겨울은 어딘가 따듯했었던 것 같은데.

 

 

 

원우야.”

 

 

 

부르는 목소리에 발이 멈췄다. 너일까. 네 목소리인데. 너는 과장님을 실은 차를 운전해 떠났을텐데도. 너일까.

 

 

뒤돌아서는 용기가 필요했다. 너일까, 기대하다가 이내 무너졌던 수많은 기억들이 그 순간에 다 지나갔으므로.

 

 

마침내 진짜 너였다. 권순영이었다. 뛰어오느라 앞머리가 살짝 갈라지고 입김을 내쉬며 호흡을 가다듬는.

 

구년 만에 만나는 권순영에게는 어떤 말을 해야 할까. 일년 만에 만나는 권순영에게 하고 싶은 말과 이년 만에 만나는 권순영에게 하고 싶은 말, 삼년, 사년, 오년 만에 만나는 권순영에게 하고 싶은 말까지는 생각해두었었는데 그 이후부터는 그저 만날 수 있기만 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다 차지해서 미처 생각해두지 못했다. 스물에 헤어졌다가 스물아홉에 다시 만난 너와 나 사이에는 어떤 말과 눈빛이 오가야 하는 건지.

 

 

권순영이 한 걸음씩 다가왔다. 내 앞에 멈춰선 권순영이 한참을 망설이며 입술을 달싹이다 멈추고는 팔을 들어 나를 품에 안았다. 안겼다는 게 맞는 표현일지도 몰랐다. 키는 원래 내가 더 컸으니까. 항공점퍼를 입은 권순영의 등을 나도 마주 안고 우리는 한참 겨울의 길거리에서 서있었다. 미안하다고 속삭이는 권순영의 목소리와 함께.

 

 

권순영의 대리 파트너 분의 이해와 아량으로 나를 잡을 수 있었던 권순영은 타고 온 대리차량을 사무실에 옮겨놓고 나와 함께 걸어 얼마 전 마련한 작은 내 원룸으로 들어왔다. 침대에 걸터앉아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네가 떠난 이유와 나타나지 못했던 이유에 대해.

 

 

권순영은 부유하지는 않았으나 가난하지도 않은 평범한 중산층의 아들이었다. 물론 나도 마찬가지이고. 차이가 있다면 나는 그 신분이 유지되었으나 권순영은 고3 수능 즈음에 가세가 기울어 그마저도 되지 못했다는 것 정도. 아버지가 보증을 섰던 분이 도망을 가고 수 억이 되는 돈을 갚아야 할 신세가 되었다는 것. 아버지와 어머니, 권순영이 지난 구 년 동안 뼈 빠지게 일해 겨우 겨우 거의 다 갚아가고 있다고 했다. 집안이 망한 것과 나를 떠난 것이 무슨 관계냐 묻자 권순영은 잘 잇던 말을 끊고 한참을 나를 빤히 쳐다봤다.

 

 

 

원우야, 너는 나 자존심 센 거 알지.”

 

…….”

 

어린 마음엔 그랬어. 집안 망한 게 너무 쪽팔리고 너에게 창피하고.”

 

.”

 

그리고 너는 더 돈 많고 좋은 사람을 좋아하는 게 더 나을 것 같았어. 나 자신이 너무 초라하게 여겨졌으니까.”

 

그럼 아까는? 아까도 대리뛰고 그러는 너가 창피하고 초라해서 그런 거야?”

 

아마도. 너는 번듯한 직장인이고 어쩌면 예쁘고 착한 여자랑 결혼해서 좋은 가정을 꾸렸을 수도 있었으니까.”

 

 

 

그 말을 하던 권순영은 잠깐 목을 가다듬었다. 얼마나 복잡하고 많은 생각이 네 머릿속을 지났을지 나는 알지 못한다. 다만 나는 권순영은 역시 알 수 없을 내 생각을 말하기 시작했다.

 

 

 

나는 네가 말도 없이 떠난 이후로 얼마나 많은 상상을 했는지 몰라.”

 

미안해.”

 

유학을 간 걸까. 혹시 어디 다친 걸까, 어쩌면 죽은 걸지도 몰라. 그러면 난 어떡하지. 아니야. 그냥 연락을 할 수 없는 어떤 곳에 있는 걸 거야.”

 

…….”

 

나는 지금 사실 조금 화 나. 처음에 너 봤을 때는 너무 놀랐고 그 다음에는 살아있었구나 하는 안도가 들었다가 좀 지나니까 살아있었고 이렇게 서울에 있었는데도 연락 한 번 없었구나 하는 거에 화가 났어. 그래. 열아홉, 스물은 어렸으니까 그랬다고 쳐. 좀 지나고 나서는 연락할 수 있었잖아. 나는 진짜네가, 죽었을까봐

 

 

 

권순영을 다시 만나면 절대 울지 않을 거라는 내 다짐이 속절없이 무너졌다. 눈물을 뚝뚝 흘리며 이불을 꽉 쥐었다. 속상함과 안도와 원망과 모든 감정이 섞여 마음을 무너뜨렸다. 권순영이 미안해 되뇌며 우는 내 얼굴을 제 가슴께에 올려두었다. 권순영에 기대 너 진짜 나빴어, 웅얼댔다. 스물아홉의 권순영은 여전히 꽤 다정하게 등을 토닥토닥 토닥여주었다.

 

 

울음이 멎고 휴지로 벅벅 눈물과 콧물을 닦아냈다. 권순영 앞에서 엉엉 울어댄 게 조금 창피하기도 했고 민망하기도 했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데 권순영이 냉장고에서 꺼내온 건지 물을 건넸다. 고마워, 대꾸하고 마시는데 느닷없이 옆에서 웃음소리가 터졌다. 그 웃음소리에 나도 덩달아 웃음이 터져 실실 웃었다.

 

 

 

나는 맨날 생각했거든. 어른 전원우는 어떨까하고. 근데 지금 보니까 똑같네. 너 고2때 모의고사 지문 슬프다고 국어시간 끝나고 울었던 거 기억나?”

 

그 얘기 꺼내지마.”

 

. 난 그 때 너 되게 귀여웠는데. 코는 빨개져가지고 코 막힌 목소리로 아니, 이 지문이 너무 슬프잖아.’하면서 우는 거. 매점에서 내가 오렌지주스 사다 주고 나서야 웃었잖아.”

 

그러는 너는. 나 슬럼프 와서 힘들었는데 고3 3월 모의고사에서 성적 올랐다고 하니까 엉엉 울었었잖아. 담임이 그 때 너 성적도 아닌데 왜 이렇게 우냐고 뭐라고 했었는데.”

 

 

 

아직 눈물이 맺힌 발간 눈으로 고등학생 때의 서로를 기억하며 키득대며 웃고 있자 심각한 고민이고 약간의 어색함이고 다 사라졌다. 너는 여전히 조금 남은 네 빚 때문에 모든 걸 망설일 거고 나는 네가 말없이 떠났었던 그 트라우마 때문에 망설일 거지만 아무렴 어떤가 싶었다. 생사도 모르고 너를 불안해하며 마냥 기다리던 그 때의 나보다는 지금의 내가 훨씬 나았다. 보고 싶을 때 볼 수 있을 거고 목소리가 듣고 싶을 때 들을 수 있을 거니까. 그래 네가 있다는 것 만으로도 나는 모든 게 다 괜찮아지는 느낌이다.

 

 

 

원우야.”

 

.”

 

그 때의 나는 너를 좋아했어.”

 

나도.”

 

그 때에 내가 도망쳐서 미안해.”

 

?”

 

사랑할 수 있었던 때. 사랑을 시작할 때.”

 

 

 

과거 형으로 하는 말에 불안해져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지금은그 때가 아니야?”

 

그 때의 나랑 지금의 내가 얼마나 다른 지 봐. 지금의 나는 절대 도망 안 칠게.”

 

 

 

절대, 도망 치지 않는다며 씩 웃는 권순영 얼굴에 울음이 터졌다.

 

 

 

…….”

 

우리, 사랑할 때 지난 거 아니지?”

 

…….”

 

울지 말고. 원우야. 울지 마. 미안해. 그 때 도망쳐서 미안하고. 그동안 연락 없이 계속 도망쳐서 미안해.”

 

나 때문에, 무리 안 해도 돼.”

 

?”

 

미안하고 그런 맘에 그러는 거 안 해도 돼. 나 기다릴 수 있어. 기다리는 거 잘해.”

 

 

 

울음을 삼켜가며 하는 말에 순영이 눈가를 찡그렸다. 권순영이 두 손으로 내 얼굴을 잡고는 손가락으로 살살 눈물이 묻은 볼을 닦아냈다.

 

 

 

너는 내가 되게 다정하고 착한 사람인 줄 알아.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너 착해, 순영아.”

 

아니. 나 착하다고 하는 거 너 밖에 없어. 그 때도 지금도. 고딩 때 애들이 너한테만 내숭떤다고 얼마나 욕했는데. 너만 몰라. 너 생각보다 나는 훨씬 나쁜 사람이야.”

 

권순영

 

그러니까 너 배려한다고 내가 맘에 없는 말 하고 그러지 않는다고. 내가 하는 말은 다 진심이야. 물론 나는 지금 일하고 빚 갚고 그래야 되는 거 맞아.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근데 나는 그렇다고 해서 지금 너까지 잃고 싶지 않아. 스무살부터 스물아홉까지의 전원우를 곁에서 못 지켜보고 못 안아보고, 그런 거 다시 하고 싶지 않아.”

 

 

 

내 볼을 닦아주는 권순영의 손을 잡아내렸다. 그 때는 없었던 굳은 살이 손 구석구석에 박혀있었다. 치열하게 살아왔을 지난 구년간의 권순영을 훔쳐보았다. 권순영의 손을 잡고 내려다보는데 순영이 손으로 내 손을 잡고 들어올렸다.

 

 

 

사랑할 때를 놓쳤다면, 우리가 그 때를 지나쳤다면 다시 잡으면 돼. 다시 때를 만들면 돼. 그러면 되잖아.”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가 생길 때까지 기다리지 않았다. 바로 용기를 내어 말했다. 좋아한다고. 사랑한다고. 손을 풀어 다시 끌어안고 서로를 붙잡았다. 여전히 사랑스럽고 여전히 밝게 빛나는 우리. 사랑할 때가 지났을 리가 없었다.

 

 

 

 

 

 

*

 

 

시간이 많이 흘러간 후였지만 결국 이렇게 만남에, 만날 수 있음에 감사했다. 앞으로 지난 구년의 간극과 그 시간만큼의 경험 차이로 서로 어긋나고 이해할 수 없는 게 생기고 의견 차이가 생기겠지만 다시 사랑의 시기를 맞춰 사랑을 이어갈 거니까. 괜히 먼저 겁먹고 도망치는 일은 다시는 없을 거였다. 나도 그리고 원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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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 x 17171717 (쥐구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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