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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

성탄절 영원 조각






"귀신이에요 아니면 도둑이에요?"






 어둠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깜짝 놀라 뒤로 넘어졌다. 폭신폭신한 쿠션 덕분에 머리가 깨지거나 하는 일은 다행히 없었는데 목소리에 놀란 심장은 계속해서 쿵덕쿵덕 뛰었다. 목소리로 먼저 자신을 알린 남자가 더 걸어나오면서 거실의 조명을 켰다. 남자가 눈도 제대로 못 뜨고 자다깨서 가라앉은 목소리로 내게 물어왔다.




"귀신 처음 보는데, 진짜 귀신이에요?"
"…아니요."
"그럼 진짜 도둑이에요? 강도?"
"그것도 아니요."




 눈을 비비던 남자가 태연하게 소파에 앉더니 트리 옆에 서있던 나를 똑바로 올려다봤다.




"그럼 뭔데요?"
"…산타요."





*






 춥기만 한 크리스마스다. 오늘 새벽까지 일해서 눈 좀 붙일까 했는데 아까 그 남자의 약속이 생각나서 그가 말했던 가게 앞 벤치에 앉아있었다. 손을 패딩 주머니에 넣고 나오는 입김을 멍하니 보고 있는데 옆에 누가 앉았다. 슬쩍 보니 오늘 새벽의 그가 맞았다. 춥지도 않은지 코트만 달랑 입고 나왔다. 와인색 목폴라티가 꽤, 아니 아주 잘 어울려서 빤히 봤다. 남자가 시큰둥한 얼굴로 그런 나를 보더니 진짜 산타에요, 물어왔다.




"정확히 그 질문만 14번째에요."
"못 믿겠으니까요. 도둑인데 어떻게든 상황을 모면하려고 그런 거짓말을 했던거라면 지금이라도 돌아가요. 난 신고 안 할 거니까."
"집에 10살 짜리 남자애가 있죠? 그 남자애가 크리스마스 선물로 게임기를 원했고."
"그거 부모님이 준비했다 하던데요."
"원래 산타 일이 그런거에요. 갖다놓고 문제 생기지 않게 부모님 또는 보호자의 의식 속에 들어가 조작도 좀 하고, 실제 현실도 조작 좀 하고, 카드도 그 필체로 쓰고."

"…진짜 산타?"
"15번째네요."



 남자가 코를 훌쩍이며 눈을 떼구르르 굴렸다. 훌쩍이는 소리가 말하는 중간 중간 계속 들렸다. 신경이 쓰였다. 자리에서 일어나서 걷기 시작하니 남자가 옆에 딱 붙어서서 어디가냐,며 쫑알쫑알 말하기 시작했다. 그 말들을 흘려들으며 주변에 있던 카페 중 하나에 들어갔다. 자기 남동생이 선물을 받고 얼마나 기뻐했는지를 서술하던 남자가 주문대 앞에 서서 나를 돌아봤다.




"이런 거 산타가 사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산타는 박봉이에요."




 둘 다 커피를 싫어해서 나는 레몬에이드, 그는 핫초코를 시켜놓고 마주보고 앉았다. 서양 유명 가수의 캐롤이 흘러나오고 카페 내 자리가 커플과 가족들로 그득그득했다. 시끌벅적한 대화들이 주변에서 끊이질 않았다. 행복한 듯한 웃음소리가 카페에 가득찼다. 남자는 뜨거운 음료를 호호 불어가며 천천히 마셨고 틈틈이 나를 훔쳐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어디 안 가니까 그냥 마셔요. 쳐다보지 말고."
"어디 갈까봐 쳐다보는 거 아니에요."
"……."
"진짜 산타인가. 산타가 왜… 할아버지가 아니지. 산타가 이렇게 허술하면 그동안 얼마나 많이 들켰을까. 뭐, 그런 생각하고 있었어요."




 진짜 그런 생각들을 하고 있었는지 남자가 말이 끝나자 컵에 시선을 박은 채 떼지 않았다. 그 남자를 바라보다 얼음이 가득 들어 정작 에이드는 별로 들지 않은 레몬에이드를 빨대로 쭉 들이켰다. 목을 축이고 난 후 고개를 들자 남자가 다시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아까처럼 호기심의 의미는 담겨있지 않았다. 잔잔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남자가 쓰고 있던 동그란 안경을 빼서 테이블 위로 올려놓았다. 콧대를 몇 번 꾹꾹 누르며 마사지를 한 남자가 다시 내쪽을 쳐다봤다. 시선이 묘하게 어긋났다.





"저기, 산타분."
"네."
"오늘이 지나면 뭐, 북극이든 남극이든 하늘이든 가는거에요?"
"기밀이에요."

"오늘이 지나도 또 만날 수 있어요?"
"…기밀이에요."

"뭐 다 기밀이래. 치사하다."
"기밀이니까요."
"그럼 처음부터 무시하지, 나오라고 했다고 왜 나왔어요?"
"무시한 적 없고, 나오고 싶어서 나왔어요."





 한 마디도 지지 않는 나에 남자가 안경을 다시 집어들어 쓰고는 나를 째려봤다. 흑갈색의 머리가 차분히 내려져있는데다 안경으로 약간은 날카로워보이는 눈매도 가려져서 남자가 아무리 째려보고 있다고 해도 무서워보이진 않았다. 자신의 째려봄에도 반응이 없는 나 때문에 속이 답답했는지 남자가 내 앞에 놓인 에이드를  뺏어가 빨대를 빼고 벌컥벌컥 마셨다. 얼음을 우적 씹어먹고는 에이드를 다시 내 앞에 내려놓은 남자가 팔짱을 끼고 뒤로 기대어 앉았다.

 가끔 산타를 보는 아이들이 있다. 순수한 눈이기 때문인지, 아니면 어리기에 영을 보는 능력이 완전히 없어지지 않은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아이들은 산타가 와서 주고 가는 선물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 저런 표정을 하곤 했다. 어딘가 모르게 불퉁하고 삐진듯한 얼굴.

 남자가 그런 얼굴을 하고서는 손을 테이블에 올려 손장난을 했다. 그 표정과 손짓이 귀여워서…




"왜 웃어요."




 웃음이 났다.




"갑자기… 웃긴 생각이 나서요."
"사람 앞에 두고 딴 생각이나 하고."
"미안해요."
"됐어요. 에이드 다 마셨어요?"




 다 마셨네, 일어나요. 내 음료컵을 보고서는 남자가 일어나 쟁반에 컵 두개를 담아 카운터 옆에 갖다주었다. 천천히 따라 일어나자 남자가 따라오라는 듯 손을 까딱하고 앞장서 걸었다. 카페를 나오자 찬바람이 훅 끼쳤다. 남자가 떨면서도 씩씩하게 걸음을 옮겼다. 그 옆에 서서 함께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남자가 아기자기한 사진들이 붙여진 한 공간으로 들어섰다. 작은 입구를 통과해 가게 안에 들어가자 큰 네모난 기계들이 올망졸망 모여져있었다. 뭐지. 의아하게 주변을 살피고 있는데 남자가 익숙하게 한 기계 안으로 들어갔다. 따라 들어가자 환한 빛이 가득하고 여러개의 화면이 보였다.




"스티커 사진 아시나? 여기 보이죠. 여기 보면서 웃으면 돼요. 알았죠?"





 남자가 기계에 돈을 넣더니 이것저것 눌렀다. 곧 숫자가 화면에 떴고 남자가 내게 밀착하며 웃어요 웃어, 속삭였다. 남자의 얼굴이 화면을 통해 보였다. 손가락 두개를 펼쳐 얼굴 옆으로 가져다대고 어색하게 웃고 있는 남자가 웃겨서 저절로 웃음이 났다. 찰칵, 하는 소리와 함께 남자가 자세를 바꾸었다. 내 팔에 팔짱을 낀 남자가 아까보다 더 자연스럽게 웃고 있었다. 그 웃음을 화면을 통해 보고 싶지 않아서 남자를 바라봤다. 그 순간 찰칵, 사진이 찍혔다. 나를 보지 말고 화면을 보라니까요…! 남자가 내게 꾸짖듯 고개를 돌려 말했다. 눈이 마주쳤다. 찰칵-

 입술이 닿았다. 남자의 떨리는 속눈썹에 시선이 닿았고 곧 나도 같이 눈을 감았다. 그리고, 찰칵-






 그의 집 앞으로 걸어가는 길, 남자와 손등이 계속 스쳤다. 어느 순간 남자의 손이 꼬물꼬물 내 손에 들어왔고 이내 꼭 맞잡은 손이 같은 방향으로 흔들렸다. 슬쩍 쳐다본 남자의 얼굴에는 미소가 번져있어서, 사랑스러웠다. 웃느라 볼록 튀어나온 광대에 가로등 불빛이 반사되어 반질반질 윤이 났다. 즐거운 듯 흥얼거리는 노래는 아까 카페에서 들었던 유명한 캐롤이었다. 크리스마스의 행복이 가득한 모습이었다.

 어느새 도착한 그의 집 앞에서 남자가 우뚝 멈춰섰다. 빙글, 돌아서 나를 마주보며 섰다. 그가 말하려 입을 떼는데 콧볼에 차가운 게 닿았다. 남자가 놀란 듯 움츠리다 고개를 들었다. 서서히 내려오는 하얗고 차가운 결정들.




"화이트 크리스마스."




 남자가 입을 벌리고 쳐다봤다. 가볍게 땅에 내려앉는 눈송이들이 금새 녹았다.




"이거 산타가 한 거에요?"
"아니요. 산타는 할 줄 아는 게 별로 없어요."
"그럼 더 낭만적이네! 진짜 우연하게 자연스럽게 내리는 눈이잖아요."
"산타들 사이에서 도는 전설이 있긴 해요."
"우와, 뭔데요?"

"크리스마스 이브와 당일에 사람들이 쌓은 행복량이 그 해의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결정한다는, 그런 전설이요. 올해는 다행히 많은 사람들이 행복했나보네요. 끝나가긴 하지만 눈이 내리니까요."




 남자가 눈을 반짝이며 경청하고는 다시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거 되게, 낭만적이고 좋아요. 한참을 내리는 눈을 즐기던 남자가 금새 차분해졌다. 안경을 빼내 코트 주머니로 넣은 남자가 시선을 땅에 박은 채로 말을 이었다.




"이제 못 보는 거죠."
"계속 보고 싶어요?"
"네. 계속 볼 수, 있어요?"
"곧 나를 볼 거에요. 그렇지만 나를 기억하지 못할 거에요. 산타는 믿음의 대상이어야지, 그리움의 대상이어서는 안 돼요."

"무슨 말이에요? 내가 산타 기억 못 해요? 내 기억, 지울 거에요?"
"네."
"싫어요. 나는 산타 계속 기억할거에요. 하고 싶어요."




 남자의 눈에 그새 눈물이 차올랐다. 눈이 남자의 얼굴에 닿아 녹아 없어졌다. 춥겠다. 남자의 코가 빨갛게 얼어있었다. 손을 붙잡았다. 손도 얼어있었다.




"이렇게 추운 겨울 말고, 봄으로 해요."
"네?"
"첫만남이요. 눈말고 꽃이 내리는 날로 해요."
"……."
"원우야."




 가득했던 눈물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발갛게 언 볼에 눈물자국이 남았다. 닦아내지 않으면 얼어버릴 것 같아서 손으로 슥 닦아내었다. 닦아내기가 무섭게 또 또르륵 흘러내렸다. 흘러내리면 닦고 흘러내리면 다시 닦았다. 원우가 내 손을 잡아내렸다.




"이름 몇 번만 더 말해줄래요?"
"…원우야."

"더요."
"원우야."

"한 번만 더요."
"원우야. 전원우"

"……."
"조금만 기다려줘요."
"나는 성격 급해요."
"응. 빨리 갈게요." 







*



 벌써 네 달이 지났다. 이 자식들은 기억력이 좋은건지, 남 놀리는 일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는건지 틈만 나면 술자리에서 그 얘기들을 해댔다. 처음에야 짜증나는 마음에 말도 막고 딴 소리도 해보고 욕도 해봤지만 몇 번씩 계속 되자 지겨워졌다. 그래, 해라 마음껏.



"어떻게 크리스마스 내내 잠을 자냐. 24일에 잠들어서 26일에 깨게 해달라고 하는 소원을 산타가 들어준 거 아니냐, 설마."
"진짜 전원우 리스펙트. 솔로계의 아버지셔."
"나는 진짜 전원우 죽은 줄 알았다고. 크리스마스 내내 연락 안 돼서. 어떻게 사람이 벨소리도 못 듣고 24시간 넘게 잘 수가 있어, 정말."

"…그만하자?"




 노려보며 하는 말에 서서히 잦아들었다. 내가 술자리에만 끼면 이런 얘기를 들어야겠니, 한탄하자 다시 그 이야기로 떠들썩해졌다. 됐다. 진짜, 내가 말을 말자. 안주로 나온 감자튀김만 씹어먹었다. 질근질근.



 술자리는 의외로 금새 파했다. 주도했던 녀석에게 사정이 생겼기 때문이었는데 계속 이어갈 흥이 나지 않아 2차를 제의하는 녀석들을 거절하고 빠져나왔다. 이제 진짜 봄인지 밤에도 추운 기운이 전혀 없었다. 이제 곧 있으면 여름이겠네, 싶을 정도로.

 오늘따라 집으로 가는 골목길이 환했다. 달도 밝았고. 지나가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음에도 따뜻한 기운이 넘실댔다. 조금 저조했던 기분이 좋아져서 괜히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걸었다.

 집에 가까워지는데 집 앞에 사람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가로등 불빛을 받고 서있는 사람이 집 앞 대문 옆에 등을 기대고 서있었다. 뭐지, 미친… 도둑인가. 혹시 아는 사람인가 싶어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얼굴이 식별되는 거리까지 다가가자 남자가 기다렸다는 듯 등을 떼고 내 쪽을 쳐다봤다. 놀라서 우뚝 멈춰있으니 남자가 주머니에서 두 손을 빼고 위로 들어올렸다. 저거는 뭘까. 무기가 없다는 뜻인가.

 서서히 다가가자 부드럽게 웃고 있는 남자의 얼굴이 선명히 보였다. 처음 보는 남자였다.




"안녕하세요."




 걱정말라는 듯 두 손을 들어올렸던 남자가 손을 내리고는 악수하듯 손을 건넸다. 그 손을 맞잡으며 덩달아 안녕하세요, 인사하자 남자가 환하게 웃었다. 손을 빼내고 차렷 자세로 서있는데 남자가 옆 집을 가리켰다.




"옆 집에 이사왔어요. 인사도 드릴 겸 늦은 시간에 실례인 것 알지만 찾아왔어요."
"아, 네. 어… 차라도…?"




 더듬으며 하는 말에 남자가 소리내 웃었다. 별로 웃긴 말 한 것 같진 않은데. 근데 밝은데서 찬찬히 보니 내 스타일이네. 잘 생겼다. 무서움과 경계가 뒤덮여 식별하지 못했던 모습들이 눈에 들어왔다. 단정한 옷이라든지 웃으면서 휘어지는 눈매라든지 흘러나오는 다정한 목소리라든지. 덩달아 긴장이 풀려 나도 실실 웃었다. 남자가 한참 웃던 것을 멈추고 눈을 마주했다. 시선이 곧게 맞닿았다.




"처음 뵙겠습니다. 권 순영이에요."




 남자가 이름을 말하는 순간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가로수에 매달려있던 벚꽃잎들이 휘날렸다. 남자의 머리에 어깨에 벚꽃잎이 잔뜩이었다. 자연스럽게 다가가 그 꽃잎들을 떼주었다. 남자 또한 손을 들어 내 머리의 꽃잎들을 떼어내주었다. 가까워지자 시원한 향이 감돌았다. 겨울 바람을 맞을 때의 향이었다. 특이한 향수를 쓰시나보네.




"저는 전원우에요. 앞으로 잘 지내요."
"네. 원우씨."




 겨울 바람의 향을 풍기는 남자가 어떠한 사람보다 따듯하게 웃었다. 문득 기시감이 들었지만 훌훌 털고 앞의 남자에 집중했다. 쿵쿵, 심장 뛰는 게 느껴졌다. 내가 외모를 많이 보긴 하지만 이렇게 금사빠라니. 혼자 자책하고 있을 때 다시 한 번 남자의 웃음이 눈에 가득찼다.

 금사빠든 뭐든 상관이 없어졌다. …이 남자랑 연애해야지.






-

와 진짜 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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